-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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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
6월 13일 (음력 5월 17일)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용수골)에서 아버지 대한제국 육군헌병 부위였던 홍철유(洪哲裕)와 어머니 능성(稜城) 구씨(具氏)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남, 본적지는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돌모루) 492번지. 생후 백여일 후에 서울 재동으로 옮겨 유년기를 보냄, 그의 부친 홍철유와 백부 승유(升裕)는 용인 및 화성 일대에 많은 농토를 가졌던 지주였으므로 어려서 유족한 가정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음.
아호로는 노작(露雀), 소아(笑啞), 백우(白牛) 등이 있으나, 주로 노작을 많이 사용. 별명으로는 돌부처, 고고문사(枯高文士), 대리석, 고양이, 열두박사(아는 것이 많다는 뜻) 등.
-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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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
군대 해산으로 아버지와 함께 본적지인 석우리로 돌아와 휘문의숙에 입학할 때까지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
-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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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
1881년 사망한 백부 홍승유의 양자로 들어갔다. 백모 한산(韓山) 이씨(李氏)를 양모로 모심.
-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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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두 살 위인 원효순(元孝順)과 결혼.
-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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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휘문의숙에 입학. 서울 의주로에서 하숙.
-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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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휘문고등보통학교로 개칭. 학우 정백(鄭栢), 월탄(月灘)과 함께 유인물 『피는 꽃』을 펴냄.
-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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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3·1운동 때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피체되었으나, 바로 풀려나와 6월에 낙향, 정백과 함께 고향에 은신하면서 합동 수필 「청산백운」과 시「푸른 언덕 가으로」를 발표. 장남 奎善(규선) 출생.
-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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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
다시 서울로 올라와 월탄, 정백 등과 함께 서광사(曙光社)에 관여하면서 동사에서 『문우』를 창간하고, 이 잡지에 「크다란 집의 찬 밤」을 발표.
-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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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세
재종형 사중(思仲)을 설득하여 문화사(文化社)를 설립, 문예지 『백조』와 사상지 『흑조』 창간을 준비. 시 「비 오는 밤」을 『동명』7호에 발표. 장녀 여선(女善) 출생
-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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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세
1월에 『백조』창간호 발행, 5월에 동지 2호 발행.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
-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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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
「노래는 회색, 나는 또 울다」 첫머리에 시를 넣고 쓴 수필을《동아일보》1월 1일자에 발표. 5월에 극단 <토월회>에 참여하면서 1회 공연의 자금을 조달.
-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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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세
<土月會(토월회)>의 3회 공연 때부터 문예부장직을 맡으면서 본격적 연극 활동을 하는가 하면, 재정적인 지원도 하게 되었다. 직접 「회색의 꿈」을 연출, 창작 희곡 「산유화」를 씀.
-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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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
『개벽』 61호(7월)에 소설 「봉화가 켜질 때에」를 발표. 9월 이광수(李光洙)의 「개척자」, 「재생」, 「무정」 등을 각색하여 연출.
-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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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세
2월 박진(朴珍), 이소연(李素然) 등과 함께 극단 <산유화회>를 조직. 7월 희곡 「향토심」과 번역 작품 「소나기」를 연출. 차녀 형애(馨愛) 출생.
-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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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
5월 『별건곤』 12~3호에 평문「조선은 메나리 나라」를 위시하여 『여시』와 『불교』지에 희곡「할미꽃」,「흰 젖」, 수필「귀향」 등을 발표
불교사 주최 음력 5월 8일의 경축 공연에서 희곡「출가」공연. 희곡「벙어리굿」을 썼으나, 초교에서 검열에 걸려 전문 삭제 당함.「5남매」를 번안 연출.
-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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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세
우석 박진 집에 기거, 각혈과 방랑생활이 시작됨. 희곡「제석」을『불교』56호에 발표.
-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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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세
『신조선』,『월간매신』지에 시조「한선」과 민요조시「월병」을 발표
-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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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세
삼녀 진선(軫善)이 둘째 부인 황숙엽(黃淑燁)과의 사이에서 출생.
-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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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세
자하문 밖 세검정 근처에서 한방의학을 공부하여,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
-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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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세
1월「명성이 빛날 시」예천좌 공연. 9월 산문「백조시대에 남긴 여화」를『조광』11호에 발표.
-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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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세
부인 원씨와 장남이 화성에서 서울 마포구 공덕동으로 이사.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사녀 묘선(昻善) 출생.
-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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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세
희곡「김옥균전」을 썼으나, 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주거까지 제한을 받게 됨. 그 후 절필. 차남 문선(文善) 출생.
-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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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세
강경, 전주 등지에서 교편을 잡음. 사찰순례 및 불경연구를 함.
-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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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세
8·15 해방과 함께 근국청년단 운동에 참여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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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세
1월 5일 (음력 1946년 12월 14일), 폐환으로 마포구 공덕동 장남 집에서 사망. 유해는 고향인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돌모루) 묵실에 묻혀 있음.
1919년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루고 낙향하여 정백과 함께 은신하면서 발표한 합동수필집 『청산백운』 초교본 표지와 본문(부분). 표지는 노작선생님이 직접 쓰셨습니다.
1939년 2월. 장손 홍규선씨의 결혼기념 사진입니다. 맨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노작선생님이며 그 옆이 주례 춘원 이광수입니다. 앞줄 오른쪽 세 번째는 원씨 부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