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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작홍사용
“홍사용의 정신”
露雀(노작) 선생 頌(송) 異民族(이민족)의 강점기인 20세기 초중엽 노작 홍사용 선생은 친일의 글 한 편도 쓰지 않으셨다.
올곧은 交士的(교사적) 氣槪(기개)가 어둡고 추웠던 더 궁핍의 시대에도 그렇게 선생으로 하여금 외홀로 형형한 호롱불을 켜 드시게 한 것이었다.
또 우리 신시와 신극 운동의 선구자로서 척박한 겨레 마음에 근대 문화의 씨앗을 물고 크게 싹 틔웠으니 가히 선생은 겨레의 指南(지남)이시자
우리 근대시의 우뚝한 한 봉우리이셨도다.
홍신선(1944~)시인. 제1~8회 노작문학상 운영위원장
‘조지훈의 추도사’
홍노작 선생
오직 뜻 있는 선비요 깨끗한 시인일 뿐.
일모(一毛)의 야욕도 없는 그에게 벼슬자리가 당치 않으려니와,
설혹 좋은 세상이 바친 훌륭한 직함(職銜)이 있다기로소니
이제 그를 보내는 마당에 시인 <시인 홍노작(詩人 洪露雀)> 다섯 자(字)를 두고
또 무슨 별달리 그를 알아주는 말이 있으랴 하고 눈감으면
몇십년(十年)을 하루같이 흰 모자에서부터 흰 신까지 신고 다니던 그 깨끗한 모습,
술은 마실수록 더욱 조용해지고 날 샐 무렵까지
앉은 자리에서 벽에 한 번 기대지도 않던 그 단정한 모습이며
불기(不羈)의 민족감정 때문에 글 쓸 자리를 고르다 못해
남 먼저 붓을 꺾고 만 그 정신이 역력히 살아온다.
(중략)
그의 씻은 듯한 청빈 서릿발 같은 지조는
언제나 옳은 선비의 거울이 되려니와
어둔 곳에서 모해(謀害)하고 권세에 아첨하며 의(義) 앞에서 머뭇거리는
세속의 못된 선비에게 그는 또한 뼈아픈 채찍이 될 것이다.
조지훈이 쓴 추도사 芝薰(지훈) 조동탁
‘유치환의 추모시’
하나 호롱
곡(哭) 노작선생(露雀先生)
가장 어진 조선의 심장이
이날 또 하나 멎었나니
조선의 아들이매
다친 새 모양 다리 오그리고
가오셨을 영원(永遠)한 소망옛 길
아쉽게 불판 그 애달픈 청춘(靑春)은 실상
죽지 않는 하나 호롱으로
이 땅의 뒤 따른 젊은 예지(叡智)를 길 밝혔나니
주름 주름 남아 스민 겨레의 흐느낌을
아아 당신 어찌 못다 울고 가셨나이까
유치환이 쓴 추모시 靑馬(청마) 유치환
시집 「울릉도」(1948)중에서
'박종화의 영결사'
홍노작 영결사
人生(인생)은 生(생)과 死(사)의 한 덩어리다.
사람의 집이 어느 하나 죽엄과 목숨이 없는 집이 어데 있으며,
사람의 길이 어느 하나나 송장과 어린애가 지내가지 않는 길이 어데 있는가
죽엄과 生命(생명)이 한데 轉變(전변)하는 것이 이 無常(무상)한 人生(인생)이 지나가는 路程(노정)이 아닌가.
그러하거니 어찌하여 이날에 우리는 永訣(영결)의 한숨을 뿜으며 露雀(노작)의 棺(관) 머리를 붙들고 피나게 울고 우는가.
애달프다. 情(정)든 이가 하로 밤 사이에 忽忽(홀홀)히 없어졌으니 뷔고뷘 죽엄의 뒤에 茫然(망연)히 붙들었던 이를 빼앗기고 친구는 동무를 잃었으니, 어찌 울음뿐이리요. 우리 울음은 눈물이 아니라 피로다.
그러나 모인 것을 웃고 헤어지는 것을 우는 인생임으로 그 때문에 洪露雀(홍노작)을 우는 것만 아니다.
高潔(고결)한 先生(선생)의 德行(덕행)과 쓸쓸하고 쓰라린 先生(선생)의 生涯(생애)와 沈痛(침통)한 先生(선생)의 祖國愛(조국애)를 우리는 다시금 우는 것이다.
더구나 先生(선생)이 사랑하든 우리 鄕土(향토)에 조국의 봄니 와서 노랑 저고리 개나리와 분홍치마 진달래 꽃이 필 때와 朝鮮(조선)의 가을이 와서 단둘이 祖國(조국)의 붉은 마음 吐(토)할 때에 아, 先生(선생)의 追憶(추억)을 어떻게 견딜 수 있으며 이 江山(강산)의 바람, 이 鄕土(향토)의 흙내, 이 百姓(백성)의 노래 앞에 先生(선생)이 없이 우리들만 혼자 이 鄕土(향토)의 사랑 어찌 받을 수 있으리오.
때가 와서 우리의 獨立(독립)이 完成(완성)이 種(종)소리를 울리고 祖國(조국)의 文化(문화)가 繁盛(번성)한 꽃을 필 때에 굽이굽이 솟아나는 先生(선생)의 生覺(생각)을 어떻게 참을 수 있으리오.
아, 애닳고 슬프다 선생이여. 先生(선생)은 가서 先生(선생)의 願(원)대로 우리 鄕土(향토)의 사랑속에 永遠(영원)한 抱擁(포옹)을 받으소서.
우리는 先生(선생)의 뒤를 이어 쓸쓸한 이 鄕土(향토)를 아름다운 시의 나라로, 虛僞(허위)와 卑俗(비속)의 이 땅을 眞實(진실)과 崇高(숭고)의 鄕土(향토)로, 가난과 기환의 이 나라를 富(부)와 情熟(정숙)의 朝鮮(조선)으로 先生(선생)의 最後(최후)의 悲痛(비통)을 위로코자 하오니 先生(선생)은 웃고 가소서.
아, 우리는 先生(선생)을 自然(자연)에 葬事(장사)치 않고 우리의 가슴 속에 길이길이 묻어두나이다.
檀紀(단기) 4280년 1월 9일 月灘(월탄) 박종화
‘이광수의 영결사’
홍노작 영전
露雀(노작)
만세 부흔 담담 해, 어느 날 단핏골 (花洞(화동)-편집자 註(주)) 내 집에 옥색 옥양목 두루막을 압은 표표한 선비가 찾아왔다. 그것이 노작 그대였다.
‘이슬에 젖은 참새’ 하고 우리 웃지 아니하였나. <백조>를 낼 무렵은 그대의 득의한 때였다.
무대 감독인 그대를 광무대에서 만났다.
그 조용한 음성으로 그대는 나와 나란히 서서 무대를 바라보면서, 극예술에 대한 포부를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나.
형이라 부르고, 아우라고 부르면서도 서로 만나는 날이 많지는 못하였다.
그대는 바람과 같이 불쑥 나를 찾아오는 때가 있었다. 그대는 술을 즐겨하고 선을 찬미하였다.
아들 혼인 주례를 하라고 나를 끌러 온 지도 벌써 여러 해 전이다. 노작도 나이 많았구나 하였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무척 오래간만에 그대가 동저고리바람으로 자반 비웃을 지푸라기로 묶어들고 자앗골 (孝子洞(효자동)-편집자 註(주)) 거리로 올라가는 것을 만난 것이 이제 보면 우리 둘이 금생의 엉결이었다.
지난 봄에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서 꼭 나를 만나서 할 말이 있으니, 시간을 알려 달라고 하고는 그대는 오지 아니하고 말았다. 아파서 못 왔던가, 꼭 내게 하려던 말은 무엇인가. 이제는 들을 길이 없다.
피차에 법계를 두루 도노라면 만날 날 있으려니, 둘의 인연이 이것이 끝은 아닐 것이다.
노작아 가난 고생에 세상 풍파에 시달린 혼을 편히 수이라.
정혜 정월, 그대 몸이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이광수(李光洙)
춘원의 홍노작 영전 영결사(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