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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작홍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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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용의 유년시절

노작 홍사용은 경기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에서 아버지 홍철유와 어머니 능성 구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경기 용인 및 화성 일대에 많은 농토를 가진 지주였으므로 노작은 어린 시절을 남부럽지 않게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태어난지 100일만에 무관학교 1기생에 합격한 부친을 따라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가 9세 때 부친의 군대가 해산하고 백부 승유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본적지인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돌모루)로 이사하였다.(사진1)
그 뒤 부친이 그를 위해 만든 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7세에 다시 홀로 상경, 휘문의숙에 입학했다.

홍사용의 학창시절과 문학의 길

휘문의숙 재학시절(사진2,3,4) 동기인 정백, 1년 후배인 박종화 등을 만나 문학수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그는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고, 3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 그 해 6월에 고향에 돌아온다. 고향에서 정백과 함께 현량개에 은신하면서 수필과 시를 쓰며 월탄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후 홍사용은 재종형 홍사중을 설득해 ‘문화사’를 설립하고 문예지 《백조》와 사상지 《흑조》를 기획, 《백조》만 간행했으나 3호로 단명하고 말았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 신극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23년 근대극 운동의 선구적 극단인 토월회에 가담해 문예부장직을 맡았고 직접 서양극 번역과 번안 그리고 연출도 했다. 1927년에는 박진, 이소연과 ‘산유화회’를 결성하고 1930년에는 홍해성, 최승일과 신흥극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홍사용의 꺾이지 않은 마지막 길

30세 무렵부터 5년간 홍사용은 미투리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화류목 단장을 짚고 전국 곳곳을 방랑했다. 1932년 〔불교誌〕에 희곡《벙어리굿》을 발표, 1935년을 전후하여 세검정 근처에 자리 잡고 한의공부를 하여 한동안 한의사로 생계를 유지했다.
1939년 희곡 《김옥균전》을 쓰다가 일제의 검열로 붓을 꺾어버렸다. 그는 이 일로 주거 제한조치를 받기도 했다.
이후 강경·전주 등지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모두 오래 가지 못했으며, 1944년에는 이화전문에 잠시 출강했다. 해방 후 근국청년단에 가입, 청년운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지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7년 1월 5일 (음력 1946년 12월 14일) 폐환으로 별세했다.(사진5)

배경
사진1)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돌무리). 현재 동탄신도시 일대

인물사진1
사진2) 휘문의숙 시절

인물사진3
사진3) 휘문의숙 선배졸업생 송별 기념사진(원내가 홍사용선생님)

인물사진2
사진4) 휘문의숙 4학년 때의 모습

인물사진4
사진5) 노작홍사용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