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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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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소재지 설립연도 설립목적 주요사업
연극단체 서울 1923년 문학동호회와 연극공연 번역극과 창작극 공연

토월회 뜻

‘이상(理想)은 하늘(月)에 있고, 발은 땅(土)을 디딘다’ 는 회원 김기진의 제안으로 이름을 ‘토월회’라고 했다는 설이 있으며, 십일월(十一月)에 결성되었으므로 토월회라고 붙였다는 설도 있다. 평범한 가운데 현대미가 있는 회명(會名)을 짓기로 하여 처음 ‘신월회(新月會)’라 붙였으나, 현실(土)을 도외시하지 않고 이상(月)을 좇는다는 뜻으로 토월회라 고쳤다고 한다.

토월회란

토월회는 1922년 2월 일본 유학생인 박승희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전문 극단으로서, 신파극에 대항하여 본격적인 근대극 운동을 펼쳤다. 박승희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전문 연극인이 아니어서 합평회를 주로 하다가 대중의 의식을 계몽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분야가 연극이라고 의견을 모아 그해 조선극장에서 첫 공연을 가짐으로써 연극단체로 전환하였다. 해외 희곡을 번역해 연극으로 올리기도 하고 박승희의 창작 희곡을 공연하기도 하는 등, 활발하게 신극을 무대에 올렸다. 제2회 공연이 끝난 후 박승희를 제외한 창립회원들은 떠나게 되었고, 이후 박승희를 회장으로 하여 홍사용, 원우전, 정원택, 이백수가 각각 경리직책을 맡음으로써 명실상부 새로운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번역극을 계속 상연하고 다채로운 신극운동을 전개하며 어느정도 인기를 끌었지만 토월회의 경영난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1931년 해산하게 되었다.(사진1) 토월회 단원들과 함께

사진1) 토월회 단원들과 함께(원내가 홍사용선생님)

토월회와 홍사용

홍사용은 시, 수필, 소설 등에 관심을 보이며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1920년대 중반부터 연극활동, 희곡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연극인으로서도 큰 몫을 한 사람이다.
1923년 극단 토월회가 창립공연을 위해 동경으로부터 귀국했을 때 그는 연극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창립공연의 빚을 일부 갚아주면서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해 말 홍사용은 토월회의 문예부 책임자를 맡게 되었고, 1924년 1월 토월회 제3회 공연 때 <회색꿈>이라는 작품을 처음으로 번역하고 가끔 연출도 할 만큼 열성적이었다.
당시의 희곡들이 관념적인 주제에 남녀 간의 애정, 가정불화 등을 다룬 것에 비해 그의 작품이 민족운동의 성격을 띠고 전개된 것은 희곡사에 선도적인 것이었다. 홍사용은 작품을 통해 민족의 아픔과 정한을 표출하며 일제에 저항하였다.